도쿠가와 이에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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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에도 막부의 6대 쇼군으로, 1662년에 태어나 1712년에 사망했다. 고후 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서자였기에 가신의 양자로 자랐으며, 1709년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사망한 후 48세의 나이로 쇼군에 취임했다. 그는 겐로쿠 살생금지령을 폐지하고, 문치 정치를 강화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으며, 교토 천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재임 기간 동안 '호에이'와 '쇼토쿠' 연호를 사용했으며,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치세와 함께 '쇼토쿠의 치'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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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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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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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쿠가와 이에노부 |
일본어 이름 | 徳川 家宣 |
로마자 표기 | Tokugawa Ienobu |
어릴 적 이름 | 신미 사콘, 마쓰다이라 도라마쓰 |
시호 | 문소원 |
계명 | 문소원전 증정일위대상국공, 문소원전순련사청예곽연대거사 |
묘소 | 도쿄도미나토구 삼연산광도원 조조지 |
관직 정보 | |
관위 | 종3위・좌근위권중장, 참의, 정3위, 권중납언, 종2위・권대납언, 정2위・내대신, 우근위대장, 증정1위・태정대신 |
막부 | 에도 막부 6대 쇼군(재임: 1709년 - 1712년) |
번 | 가이고후 번 번주 (재임: 엔포 6년 (1678년) - 호에이 원년 (1704년) |
생애 | |
출생 | 1662년 6월 15일 |
출생지 | 고후시, 야마나시현, 에도 막부 |
사망 | 1712년 11월 12일 |
사망 장소 | 에도 막부 (현재의 일본)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도쿠가와 쓰나시게, 어머니: 조쇼인 |
양아버지 | 신미 마사노부, 도쿠가와 쓰나요시 |
형제 | 마쓰다이라 기요타케 |
배우자 | 정실: 고노에 히로코 |
측실 | 오키세노카타, 오고무노카타, 오스메노카타, 사이구 |
자녀 | 도요히메, 무게쓰인, 이에치요, 다이고로, 이에쓰구, 도라키치 |
양녀 | 마사히메 (고노에 이에히로의 딸) |
2. 생애
1662년부터 1712년까지의 생애를 다룬다.
1704년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정식 상속인으로 인정받아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하고 에도 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 거처하였다. 1709년 쓰나요시가 사망하자 48세의 나이에 6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취임 직후 살생금지령을 폐지하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를 면직시키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다. 마나베 아키후사, 아라이 하쿠세키 등을 등용하여 문치(文治) 정치를 강화하고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1712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도쿄 미나토구의 조조지에 있다.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쇼군 재임 기간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
1704년 12월 31일 (호에이 원년 12월 5일) | 쇼군 후계자가 됨. |
1705년 3월 29일 (호에이 2년 3월 5일) | 종2위 권대납언으로 승진. 이에노부로 이름을 고침. |
1709년 6월 8일 (호에이 6년 5월 1일) | 정2위 내대신으로 승진. 우근위대장을 겸임. 정이대장군·겐지 장자 선하. |
1712년 11월 12일 (쇼토쿠 2년 10월 14일) | 사망. |
1712년 12월 1일 (쇼토쿠 2년 11월 3일) | 증 정1위 태정대신. |
2. 1. 초기 생애 (1662년 ~ 1694년)
1662년 6월 11일(간분 2년 4월 25일) 에도 네즈(根津)의 저택에서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조쇼인이다. 쓰나시게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 하녀 신분이었던 조쇼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던 탓에, 가신 신미 마사노부에게 맡겨져 '''신미 사콘'''(新見左近)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의 양자로 성장하였다. 생모 조쇼인은 1664년 사망하였다.부친 쓰나시게에게 남자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자, 9세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1676년 관례를 치른 뒤 백부이자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이름의 한 글자를 하사받아 쓰나토요(綱豊)가 되었다. 1678년 쓰나시게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25만 석 번주의 자리를 계승한 뒤 조모인 준쇼인의 보살핌을 받았다.
1680년 쇼군 이에쓰나가 후계자 없이 중태에 빠지자, 이에쓰나의 동생 고즈케 다테바야시번주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함께 강력한 쇼군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신 홋타 마사토시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핏줄에 더 가까운 쓰나요시를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쇼군 자리에서 탈락하고 쓰나요시가 5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1694년, ''로닌''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이에노부(당시 쓰나토요)의 개인 교사이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하쿠세키는 에도에서 교사로 일했지만, 철학자 기노시타 준안의 추천으로 이에노부의 개인 교사가 되었고, 이에노부의 에도 저택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하쿠세키는 이에노부에게 중국 고전과 유교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이후 쓰나요시마저 남자 후계자가 없자 쓰나요시의 사위인 도쿠가와 쓰나노리와 다시 후계자 경쟁을 벌였으나 쓰나노리가 요절하면서 1704년 쓰나요시의 정식 상속인으로 인정받고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한 뒤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 거처하였다.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초기 생애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날짜 | 사건 |
---|---|
1662년 6월 11일 (간분 2년 4월 25일) | 에도 네즈(根津)의 저택에서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장남으로 출생. 어머니는 조쇼인. |
1664년 | 생모 조쇼인 사망 |
1670년 8월 24일 (간분 10년 7월 9일) | 마쓰다이라 토라마쓰를 칭함. 그 이전에는 신미 사콘이라고 칭함. |
1676년 | 9세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관례를 치름. 백부이자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이름의 한 글자를 하사받아 쓰나토요(綱豊)가 됨. |
1677년 1월 15일 (엔포 4년 12월 12일) | 종3위에 서임되고, 좌근위권중장에 임명됨. |
1678년 12월 8일 (엔포 6년 10월 25일) | 부친 도쿠가와 쓰나시게 사망. 17세의 나이로 25만 석 번주의 자리를 계승. |
1680년 9월 10일 (엔포 8년 8월 18일) | 산기에 임명됨. |
1680년 10월 28일 (엔포 8년 9월 6일) | 정3위에 승서함. |
1691년 1월 13일 (겐로쿠 3년 12월 15일) | 권중납언으로 승진. |
1694년 | 로닌 아라이 하쿠세키가 개인 교사이자 고문으로 임명됨. |
2. 2. 쇼군 후계자 시절 (1694년 ~ 1709년)
1680년 쇼군 이에쓰나가 후계자 없이 위독한 상태가 되자, 이에쓰나의 동생 고즈케 다테바야시번주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함께 유력한 쇼군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신 홋타 마사토시가 3대 쇼군 이에미쓰의 혈연에 더 가까운 쓰나요시를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쇼군 자리에서 탈락하고 쓰나요시가 5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쓰나요시마저 남자 후계자가 없자 쓰나요시의 사위인 도쿠가와 쓰나노리와 다시 후계자 경쟁을 벌였으나 쓰나노리가 요절하면서 1704년 쓰나요시의 정식 상속인으로 인정받고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한 뒤 에도 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 거처하였다.[8]2. 3. 쇼군 재임 시절 (1709년 ~ 1712년)
1709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사망하자 48세의 나이로 6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취임하자마자 선대의 악명 높은 살생금지령을 폐지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인기와 기대를 얻었다.[6] 또한 쓰나요시의 총신(寵臣)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를 면직한 뒤 고후 시절의 가신들인 마나베 아키후사, 아라이 하쿠세키[8] 등을 등용하여 문치(文治) 정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악화되는 바쿠후의 재정을 염려하여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재위 3년 만인 1712년 11월 12일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이에노부는 즉시 일본 사회의 특정 요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쿠후를 군사 기관에서 민간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는 이미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쓰나요시의 통치 기간 동안 진행 중이었다. 그는 쓰나요시의 논란이 많은 법률과 칙령을 폐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쓰나요시에 의해 엄격한 권한을 부여받았던 시중들은 모든 권한을 빼앗겼다. 또한 1710년, 쇼군 이에노부는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표현을 개선했다. 검열도 중단되었고, 이에노부는 그의 부하들에게 민중의 생각과 감정이 바쿠후의 고위층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하쿠세키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가혹한 처벌과 박해가 중단되었으며, 사법 제도 역시 개혁되었다.
그러나 쇼군 쓰나요시의 통치에서 없애지 않은 한 가지 유물이 있었다. 신유학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후원을 받았는데, 이는 하쿠세키가 이에노부에게 오랫동안 유교 경전을 강의해 온 덕분이었다. 경제 개혁 또한 보장되었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화가 만들어졌다.
쇼군 이에노부는 수 세기 동안 실제로 교토의 천황과 조정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려 했던 최초의 쇼군 중 한 명이었다. 1711년, 후지와라 섭정 고노에 모토히로가 쇼군 이에노부와 나카미카도 천황 및 그의 귀족들(교토) 간의 회담을 중재하기 위해 교토에서 에도로 왔다. 이에노부가 주도했지만, 모토히로도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담이 끝난 후, 천황의 어린 아들들은 사제직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며 황실의 새로운 분가를 형성할 수 있고, 그들의 딸들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 결정되었다(사실, 나카미카도 천황의 여동생 중 한 명이 쇼군 이에노부의 어린 아들,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결혼했다). 또한 바쿠후는 조정에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많은 조정 의례도 부활했다. 따라서 쇼군 이에노부의 통치 기간 동안 조정과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다.
3. 정책
1709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혈통을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 자리에 올랐다.[1] 이에노부는 바쿠후를 군사 기관에서 민간 기관으로 변화시키고,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의 법률과 칙령을 폐지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1] 아라이 하쿠세키의 영향으로 검열을 중단하고 가혹한 처벌을 없앴으며,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경제 안정을 위해 금화를 만들었다. 교토의 천황 및 조정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나카미카도 천황과 회담하여 황실 권한을 강화하고 재정 지원을 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2]
3. 1. 내정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즉위 후 일본 사회의 특정 요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쿠후를 군사 기관에서 민간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평가받는데, 이는 이미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통치 기간 동안 진행 중이던 과정이었다. 그는 쓰나요시의 논란이 많았던 법률과 칙령을 폐지하고, 쓰나요시에게 권한을 부여받았던 시중들의 권한을 빼앗았다.[1] 1710년, 쇼군 이에노부는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표현을 개선했다. 검열도 중단되었고, 이에노부는 그의 부하들에게 민중의 생각과 감정이 바쿠후의 고위층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영향으로 보인다. 가혹한 처벌과 박해가 중단되었으며, 사법 제도 역시 개혁되었다.신유학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후원을 받았는데, 이는 하쿠세키가 이에노부에게 오랫동안 유교 경전을 강의해 온 덕분이었다. 경제 개혁 또한 이루어져 경제 안정을 위해 금화가 만들어졌다.
쇼군 이에노부는 수 세기 동안 실제로 교토의 천황 및 조정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려 했던 최초의 쇼군 중 한 명이었다. 1711년, 후지와라 섭정 고노에 모토히로가 쇼군 이에노부와 나카미카도 천황 및 그의 귀족들(교토) 간의 회담을 중재하기 위해 교토에서 에도로 왔다. 이에노부가 주도했지만, 모토히로도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담 후, 천황의 어린 아들들은 사제직에 들어갈 필요가 없으며 황실의 새로운 분가를 형성할 수 있고, 그들의 딸들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 결정되었다(나카미카도 천황의 여동생 중 한 명이 쇼군 이에노부의 어린 아들,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결혼했다). 또한 바쿠후는 조정에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많은 조정 의례도 부활했다. 따라서 쇼군 이에노부의 통치 기간 동안 조정과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다.[2]
3. 2. 외교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즉위 후 일본 사회의 여러 요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쿠후를 군사 기관에서 민간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평가받는데, 이는 이미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통치 기간 동안 진행 중이던 변화였다. 이에노부는 쓰나요시의 논란이 많았던 법률과 칙령을 폐지하고, 쓰나요시에게 엄격한 권한을 부여받았던 시중들의 권한을 모두 빼앗았다. 1710년에는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표현을 개선했으며, 검열을 중단하고 민중의 생각과 감정이 바쿠후 고위층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영향으로 보인다. 가혹한 처벌과 박해가 중단되었고, 사법 제도 역시 개혁되었다.[1]신유학은 아라이 하쿠세키가 이에노부에게 오랫동안 유교 경전을 강의해 온 덕분에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며 후원을 받았다. 경제 개혁도 이루어져 경제 안정을 위해 금화가 만들어졌다.
쇼군 이에노부는 수 세기 동안 교토의 천황 및 조정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최초의 쇼군 중 한 명이었다. 1711년, 후지와라 섭정 고노에 모토히로가 쇼군 이에노부와 나카미카도 천황 및 교토 귀족들 간의 회담을 중재하기 위해 교토에서 에도로 왔다. 회담은 이에노부가 주도했지만, 모토히로도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담 결과, 천황의 어린 아들들은 사제직에 들어갈 필요 없이 황실의 새로운 분가를 형성할 수 있고, 딸들은 결혼할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실제로 나카미카도 천황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쇼군 이에노부의 어린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결혼했다. 또한 바쿠후는 조정에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많은 조정 의례를 부활시켰다. 이에노부의 통치 기간 동안 조정과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다.[1]
4. 가족 관계
배우자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정실 | 덴에이인 | 간분 6년 - 간포 원년 (1666년 - 1741년) | 고노에 히로코 |
측실 | 호신인 | 덴와 2년 - 메이와 3년 (1682년 - 1766년) | 오코무노가타 |
측실 | 겟코인 | 조쿄 2년 - 호레키 2년 (1685년 - 1752년) | 오키요노가타 |
측실 | 렌조인 | ? - 안에이 원년 (? - 1772년) | 오스메노가타 |
측실 | 혼코인 | ? - 호에이 7년 (? - 1710년) | 사이구 |
자녀 | 이름 | 출생-사망 | 생모 | 비고 |
---|---|---|---|---|
장녀 | 도요히메 | 엔포 9년 - 덴와 원년 (1681년) | 덴에이인 | |
장남 | 무게쓰인 | 겐로쿠 12년 (1699년) | 덴에이인 | |
차남 | 이에치요 | 호에이 4년 (1707년) | 호신인 | |
삼남 | 다이고로 | 호에이 5년 - 호에이 7년 (1708년 - 1710년) | 렌조인 | |
사남 | 도쿠가와 이에쓰구 | 호에이 6년 - 쇼토쿠 6년 (1709년 - 1716년) | 겟코인 | 7대 쇼군 |
오남 | 도라키치 | 쇼토쿠 원년 (1711년) | 렌조인 | |
자녀(유산) | - | - | 혼코인 | |
양녀 | 마사히메 | 겐로쿠 12년 - 호에이 원년 (1699년 - 1704년) | - | 고노에 이에히로의 딸 |
5. 인물 및 평가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쿠가와 실기』는 그를 "인자한 마음을 지녔다"고 평가했다.[1]
이에노부는 어릴 적 자신을 길러준 양아버지 신미 마사노부를 몹시 신임했는데, 이를 질투한 다른 가신들이 그를 모함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노부는 거짓 모함임이 밝혀진 후에도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섬겨준 가신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처벌을 감형시켰다.
아라이 하쿠세키로부터 초대 쇼군 이에야스를 비롯한 역대 쇼군들의 사적을 배우고, 80년간의 다이묘 가문 가계도를 정리한 『한판보』를 10개월 만에 완성하여 곁에 둘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
네즈 곤겐을 우부스나(産土神)로 삼아 숭배했으며, 에도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 번저(藩邸) 터를 헌납하고 사전을 조영했다. 네즈 곤겐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기에 쇼군가로부터 숭배를 받아 예제(例祭)는 덴카마쓰리 중 하나로 꼽혔다.
쇼군이 되기 전, 여러 다이묘와 하타모토들이 뇌물에 가까운 축하 물품을 가져왔을 때 모두 거절했으며, 쇼군이 된 후에는 부정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무로 규소 등 많은 학자를 등용하여 인재 등용에 힘썼다.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생류 연애령"을 장례식 이틀 전에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저서와 날짜가 일치하지 않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일기에는 상반된 내용이 있어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에노부는 죽기 전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후계 문제에 대해 상담했는데, 하쿠세키는 어린 나베마쓰를 후계자로 삼고 푸다이(譜代)가 보좌해야 한다고 진언했고, 이에노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조조지 도쿠가와 쇼군 묘지 개장 당시 유골 조사에 따르면, 이에노부는 가는 얼굴에 콧날이 오똑하고 온화한 인상의 미남이었으며, ABO식 혈액형은 O형, 신장은 160.0cm로 당시 일본인 평균보다 약간 컸다.
6. 기타
- 자비로운 성품으로 알려졌으며, 『도쿠가와 실기』는 "인자한 마음을 지녔다"고 평가했다.[6] 도쿠가와 쓰나시게에게 세자로 불려왔을 때, 쓰나토요(이에노부의 어릴 적 이름)의 가신 신미 마사노부 등이 모함을 받아 처벌받을 위기에 처하자, 이들을 위해 목숨을 구해줄 것을 간청하여 유죄로 감형받게 했다.
-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도쿠마쓰 요절 후 이에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강력히 추천했다고 한다.
- 아라이 하쿠세키에게서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의 사적 등을 배웠고, 1600년부터 1680년까지 여러 다이묘 가문의 가계도와 약전을 정리한 『한판보』를 편찬했다.
- 네즈 곤겐을 우부스나(産土神)로 삼았으며, 쓰나요시의 양자로 에도 성에 들어갈 때 번저(藩邸) 터를 네즈 곤겐에 헌납, 사전을 조영했다. 네즈 곤겐은 이에노부와 이에쓰구 시기 쇼군가로부터 숭배받았고, 예제(例祭)는 덴카마쓰리 중 하나로 꼽혔다.
- 쓰나요시에게 양자로 들어갔을 때, 뇌물성 축하 물품을 받지 않았고, 쇼군이 된 후 부정 행위를 엄격히 단속했다.
- 무로 규소 등 학자를 초빙, 인재 등용에 힘썼다.
- 쓰나요시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쓰나요시는 "생류 연애령" 엄수를 유언했지만, 이에노부는 장례식 이틀 전 "천하 만민을 위해 감히 유언에 어긋나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실기) 단, 이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오레타쿠 시바의 기』와 날짜가 일치하지 않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일기 『라쿠시도 넨로쿠』에는 "(생류 연애령은) 모두 준수하여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고 적혀 있어,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 죽음에 임박하여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쇼군 계승에 대해 상담했다. 오와리 도노에게 쇼군직을 양보하는 안에 대해 질문했으나, 하쿠세키는 반대하고 나베마쓰를 계승자로, 푸다이(譜代)가 보좌할 것을 진언했고, 이에노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 사인은 감기(인플루엔자)로 여겨진다.[7]
- 간분 10년 7월 9일 ( 1670년 8월 24일), 마쓰다이라 토라마쓰를 칭했고, 이전에는 신미 사콘이라 칭했다.
- 엔포 4년 12월 12일 ( 1677년 1월 15일), 종3위 좌근위권중장에 임명, 같은 날 원복을 하고 이에쓰나에게서 글자 하나를 받아 츠나토요라 칭했다.
- 엔포 6년 10월 25일 ( 1678년 12월 8일), 가이국 후추성 주성을 습봉했다.
- 엔포 8년 8월 18일 ( 1680년 9월 10일), 산기에 임명되었다. 9월 6일 ( 10월 28일), 정3위에 승서했다.
- 겐로쿠 3년 12월 15일 ( 1691년 1월 13일), 권중납언으로 승진했다.
- 호에이 원년 12월 5일 ( 1704년 12월 31일), 쇼군 후계자가 되었다.
- 호에이 2년 3월 5일 ( 1705년 3월 29일), 종2위 권대납언으로 승진, 이에노부로 개명했다.
- 호에이 6년 5월 1일 ( 1709년 6월 8일), 정2위 내대신으로 승진, 우근위대장 겸임, 정이대장군·겐지 장자 선하.
- 쇼토쿠 2년 10월 14일 ( 1712년 1월 15일) 사망, 11월 3일 ( 12월 1일), 정1위 태정대신 추증.
6. 1. 관련 작품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등장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마야마 세이카의 가부키 겐로쿠 충신장 제5편 『오하마 어전 츠나요시 경』(1940년 1월 초연)에서 고후 재상 츠나요시로 등장한다.[6]
- 영화 겐로쿠 충신장(1941년, 1942년)에서 이치카와 우타에몬이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을 연기했다.[6]
- 1968년 간사이 TV 드라마 오오쿠에서는 오무라 후미타케가 이에노부 역을 맡았다.[6]
- 1971년 TV 도쿄 드라마 에지마 이쿠시마에서는 키타가미 야타로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TBS 드라마 미토 고몬 제3부(1971년)에서는 사카토 교사부로가 차기 쇼군 ·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으로 출연했다.[6]
- 1975년 NHK 대하드라마 겐로쿠 타이헤이키에서는 키무라 이사오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1982년 NHK 대하드라마 고갯길의 군상에서는 호리우치 마사미가 이에노부 역을 맡았다.[6]
- 1983년 간사이 TV 드라마 오오쿠에서는 츠유구치 시게루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1989년 TV 도쿄 드라마 다이 츄신구라에서는 나카무라 키치에몬 (2대)가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으로 출연했다.[6]
- 1989년 TV 아사히 드라마 고존지! 하타모토 타이쿠츠오토코 III에서는 나츠 유스케가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을 연기했다.[6]
- 1990년 TV 아사히 드라마 고존지! 하타모토 타이쿠츠오토코 V에서는 니시무라 카즈히코가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을 맡았다.[6]
- 1995년 NHK 대하드라마 하치다이 쇼군 요시무네에서는 호소카와 토시유키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2001년 TBS 드라마 미토 고몬 제29부에서는 하나야기 쥬라쿠 (3대)가 차기 쇼군 ·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으로 출연했다.[6]
- 2005년 후지 TV 드라마 오오쿠 ~ 화의 난 ~에서는 시바타 요시유키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2006년 TBS 드라마 미토 고몬 제35부 2시간 스페셜에서는 오카모토 류타가 차기 쇼군 ·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으로 출연했다.[6]
- 2007년 TV 도쿄 드라마 추신구라 요센인의 음모에서는 이소베 츠토무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2008년 TV 도쿄 드라마 도쿠가와 풍운록 팔대 쇼군 요시무네에서는 하시즈메 준이 이에노부 역을 맡았다.[6]
- 2015년 TBS 드라마 미토 고몬 스페셜에서는 나가이 다이가 차기 쇼군 · 고후 재상 츠나요시 역으로 출연했다.[6]
- 2017년 NHK 드라마 충신장의 사랑 ~ 48번째 충신 ~에서는 히라야마 히로유키가 이에노부 역을 연기했다.[6]
-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오오쿠 (하쿠센샤)에 등장한다.[6]
- 사사키 유이치의 소설 낭인 젊은이 신미 사콘(코스믹 출판)은 신미 사콘을 자칭하며 에도에 만연하는 악당을 쇼군가 비검 · 아오이 일도류로 처단하는 이에노부의 젊은 날을 그린 통쾌 활극이다.[6]
- 사사키 유이치의 소설 신 · 낭인 젊은이 신미 사콘(후타바샤)은 세습자로 니시노마루에 들어간 젊은 날의 이에노부가 다시 신미 사콘으로 시중에 나가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6]
6. 2. 묘소
도쿄도 미나토구의 산렌산 광도원 조조지에 묘소가 있다.[6]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2]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2006
[3]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5-06
[4]
Kotobank
徳川家宣
[5]
문서
母は父綱重の継室・紅玉院とされる。1673年 - 1673年。実在すれば家宣の異母弟となる。
[6]
문서
元禄10年(1697年)に、幕府が酒屋に対して課した運上金「酒運上」。酒価格の五割を課税していた。
[7]
서적
徳川将軍家十五代のカルテ
新潮新書
2005-05
[8]
문서
조토쿠의 치(正徳の治)라 불리는 개혁을 주도했던 아라이 하쿠세키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통신사 대접을 간략화하고자 했고, 「대군」이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嫡子)를 의미하는 칭호로 조선 국왕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일본국대군」이 아닌 「일본국왕」으로 바꿀 것을 제의하였다.
[9]
문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역대 에도 막부 쇼군 중 가장 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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